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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lling Fields(킬링 필드)

리하스스토리 2022. 12. 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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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20세기 최악의 사건

The Killing Fields(킬링 필드)는 1985년 개봉된 영화입니다.

'킬링필드'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어버리는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각 가정의 티브이는 아직 흑백 티브이가 많던 시기였고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잘 보러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저는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킬링필드'가 흑백으로 일부러 상영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요.

영화 '킬링필드'는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서 제가 고등학교 때 본 최초의 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몇십년을 킬링 필드에 빠져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인생 최고의 영화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캄보디아는 한해에 수천,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가는 아름다운 곳으로 누구나 가고 싶은 곳으로 선정된 나라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 캄보디아는 공산정권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의 지도자 '폴 포트'에 의해 점점 피바다가 되어갑니다.옆 나라 베트남이 그동안 베트남 전쟁으로 머물러있던 미군들이 1975년 철수함에 따라 캄보디아도 영향을 받습니다. 이에 캄보디아의 국민들이 친미 성향의 '론 놀'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차에 '폴 포트'는 환영의 대상이 됩니다.

그건 캄보디아 국민들의 또 다른 불행이었죠.'폴 포트'는 정권을 잡고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는 명목 아래 사유재산을 모두 압수하고 지식인 및 정치인, 농민, 부녀자, 아이 할 것 없이 200여만 명을 끔찍하게 살해합니다. 살해라기보다 학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실은 캄보디아인이였던 '디스 프란'과 미국 뉴욕타임스의 기자 '시드니 쉔버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기자인 '시드니 쉔버그'는 캄보디아의 이런 상황을 '디스 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 1980년 뉴욕 타임스에 실었고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영화가 '킬링 필드'입니다.

'The Killing Fields(킬링 필드)'는 크메르루즈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학살 장소를 말합니다. 주인공 '디스 프란'이 '시드니'와 헤어져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길을 만들어 피가 물처럼 흐르는 곳을 걸어가며 느끼는 고통의 눈물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영화 '킬링 필드'는 제게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던 그런 영화로 남아 있습니다. 2022년 초에 '킬링 필드'에 대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왔더군요. 제목은 '1975 킬링 필드, 푸난'이던데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이라 한번 찾아서 볼까 합니다.'킬링 필드'를 보다 보면 '디스 프란'의 저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 있습니다. 제목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입니다.'킬링 필드'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기타의 슬픈 선율과 함께 오래도록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제 인생 최고의 음악이 되었습니다.

 

 

네이버 출처

 

 

 

영화 '킬링 필드' 요약

4년간 캄보디아 인구 4분 1을 학살한 20세기 최대의 사건중 하나인 '킬링 필드'는 1972년 미국의 뉴욕 타임스 기자 '시드니 쉔버그'가 캄보디아에 가서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내어놓으면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시드니'는 미국이 캄보디아에 잘못 터트린 폭탄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이는 사건을 취재하러 프놈펜으로 가게 됩니다.그곳에서 통역을 맡은 캄보디 안인 '디스 프란'을 알게 되죠. 당시 론놀 정권은 미국의 후원 아래 부패에 얼룩진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캄보디안인들을 분노케 하고 1975년 4월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캄보디아는 점점 혼돈에 빠져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대사관의 도움으로 가족을 출국시키고 자신들은 끝까지 남아 취재를 하기로 합니다.'시드니'와 외국 기자들이 그들에게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지만 '디스 프란'에 의해 모두 목숨을 구합니다. '크메르 루주'의 정권은 더욱 거칠어지고 폭력적으로 변질되면서 프랑스 대사관으로 어쩔 수 없이 피신하지만 '크메르 루주'의 압박으로 '디스 프란'은 강제 노동수용소에 감금되고 맙니다.

혼자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캄보디아의 상황을 보도하면서 주목을 받지만 '디스 프란'을 두고 온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디스 프란'은 국민들이 집단학살을 당하는 모든 걸 목격합니다. 마침내 프란은 '팻'이라는 크메르루주의 일원의 도움으로 태국으로 탈출하고 마침내 시드니와 재회합니다.

 

 

 

나무위키출처

 

잊지 말아야 할  충격의 역사 '킬링 필드'

'킬링 필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크메르루주를 몰아내면서라고 합니다. 베트남은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고 국제사회에서의 여론 잠재우기라고 할까요? 주권 국가를 침공했다는 반대여론이 전 세계로 퍼져있는 상태여서 국제사회를 달래기 위해 '킬링 필드'사건을 외부에 공개했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뚜옹 슬랭 박물관(S-21)'을 만들고 동유럽과 러시아등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프놈펜 외곽의 킬링 필드 지역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 필드' 지역을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도록 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잔혹한 학살이 전 세계로 확산 알려지게 됩니다. 2005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해골 지도는 인권단체의 반발로 현재는 모두 안치되었습니다. 다행이지요.

2007년 7월 3일 재판소는 죽음의 감옥이라 불렸던 s-21 교도소 '깡 겍이우'소장을 첫 번째로 기소하여 2010년 7월 26일 징역 35년형에 처했으며, 크메르루주 정권 서열 2위였던 '누온 체아'를 비롯해서 '이 엥 사리'전 외무장관과 그의 부인 '이엥 티릿' 전 내무장관,'키우 삼판' 전 국가 주석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2015년 8월 '이엥 시릿'은 사망하였고 가장 잔혹한 벌을 받아야하는  '폴 포트'는 1998년 사망하였습니다. 단죄도 받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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